아파트 단지에 공급되는 전기는 구내에 설치된 변압기를 거쳐 각 가정으로 분배된다. 따라서 변압기에 이상이 생기면 한꺼번에 수백 세대가 정전을 겪는다. 이 변압기는 아파트 단지의 재산이기에 관리 책임 또한 주민들에게 있지만, 분기별 정기검사만으로는 과부하로 인한 변압기 고장을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 한전이 ‘고압 아파트 변압기 진단 솔루션’을 개발한 이유다.글. 강진우(자유기고가) / 사진. 김민정(MSG스튜디오)
우리 단지 변압기를 지키는
가장 스마트한 방법
고압 아파트
변압기 진단 솔루션
고압 아파트 변압기 진단 솔루션을 기획한 주역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한전 전력연구원 강동훈 연구원과 박명혜 책임연구원, 신재생사업처 김경환 부장 최재원 차장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 저녁, 한 아파트 단지 내 가정집 수백 세대의 불이 한꺼번에 꺼진다. 정전이 발생한 것이다. TV · 에어컨 · 컴퓨터 · 냉장고 등 모든 가전제품이 멈춰 선 가운데,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는다. 관리사무소에서 출동해 원인을 알아보니 아파트 단지 변압기가 고장이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낡은 변압기를 교체해야 해서 정전이 바로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몇몇 주민이 볼멘소리로 한전을 탓한다. 그들은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 변압기의 주인은 바로 주민들이라는 것을.
변압기는 우리가 전기를 사용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설비다. 한전이 송전선을 통해 발전소에서 생산된 수만 볼트의 전기를 내보내면, 전국의 각 아파트 단지 내에 설치된 변압기는 이를 220V 가정용 전기로 바꿔 각 세대에 전한다. 이 변압기는 건설사가 아파트를 지으면서 함께 설치하는 것으로, 변압기와 아파트 내 전기 설비는 해당 단지의 사유재산이며, 관리의 주체도 당연히 주민들과 관리사무소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내 변압기의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변압기를 한전의 재산으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변압기에 문제가 생기면 주로 한전으로 문의한다. 이 경우 한전은 우리나라 전기산업을 대표하는 공기업으로서 관련 민원을 해결하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니 정작 한전이 책임져야 할 공공의 전기 설비를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변압기 과부하가 많이 일어나는 여름철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변압기 관리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정기검사는 진행하지만, 그 사이 관리사무소가 할 수 있는 일은 변압기 온도가 높아지지 않도록 선풍기 등을 트는 것과 육안검사뿐이다. 이럴 때 변압기에 문제가 생기면 제대로 대처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들고, 수백 세대 주민들의 전기 생활은 한순간 멈춰서게 된다.
아파트 정전을 사전 예방하기 위해 올해부터 서비스 중인 '고압 아파트 변압기 진단 솔루션'의 웹 및 모바일 페이지
아파트 단지 변압기 관리 책임이 주민들에게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압기와 관련된 여러 불편사항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한전이 아니다. 2019년 203건에 달하는 전국 아파트 정전 횟수를 ‘0’으로 만들기 위해 2018년 ‘고압 아파트 변압기 진단 솔루션(가칭)’ 개발에 돌입한 것이다. 이 솔루션은 이름 그대로 아파트 단지 구내 변압기의 상태를 실시간 진단할 수 있는 기술로, 사물인터넷(IoT) 센서와 통신장비를 설치해 변압기 데이터를 수집 · 분석하고 현황과 고장 위험도 등 변압기 관리 및 유지 · 보수에 필요한 정보와 각 상황별 조치 가이드를 실시간으로 제공한다.
“한전은 사물인터넷 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공공 전기 설비를 효율적으로 관리해왔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를 아파트 단지 변압기에도 적용해 정전으로 인한 주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면 좋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그 결과 ‘고압 아파트 변압기 진단 솔루션’을 개발했죠. 2018년 개발 완료 후 작년 한 해 서울 · 경기도 지역 아파트 4개 단지에 실제로 적용하며 신뢰성을 높였고,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솔루션이 설치되면, 해당 단지 관리사무소 담당자와 주민들은 웹페이지에 로그인할 수 있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받는다. 이를 입력하고 로그인하면 해당 단지 변압기의 현재 부하량과 변압기실의 온 · 습도, 전기 이용률, 고장 위험도 등을 한눈에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솔루션을 통해 관리사무소 전기 담당자는 변압기의 이상을 바로 알아채고 고장에 대비할 수 있고, 주민들도 변압기의 이상 여부와 부하량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전력 사용량을 조절함으로써 정전 예방에 나설 수 있다. 솔루션 사용료를 세대별로 나눠 내기에, 세대당 월 100~200원 정도의 아주 적은 금액만으로 한층 안전하고 편리하게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강동훈 연구원이 전용학 전기과장에게 전국 1호로 설치한 아파트의 솔루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국 1호로 고압 아파트 변압기 진단 솔루션을 설치한 아파트 단지의 변압실
고압 아파트 변압기의 각종 데이터를 외부로 전송하는 모뎀
고압 아파트 변압기 진단 솔루션의 실제 효과를 살펴보기 위해, 솔루션을 전국 1호로 설치한 광주광역시의 한 아파트 단지를 찾았다. 관리사무소에서 전기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전용학 씨는 최근 변압기를 관리하며 늘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아파트가 준공된 지 20년이 넘었는데 변압기 수명은 보통 23~25년 정도니, 담당자로서 변압기 이상과 고장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고압 아파트 변압기 진단 솔루션이 개발됐다는 소식을 듣고 입주민회의를 거쳐 도입을 결정했다는 전 과장. 솔루션에 대한 그의 평가는 ‘대만족’이다.
“한눈에 변압기실의 온 · 습도와 변압기 부하량을 파악할 수 있어 무척이나 편리합니다. 변압기는 원래 열이 많이 나는 데다가, 최근에는 설비 노후화로 온도가 좀 더 높아졌다는 정기검사 진단을 받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기존에 해 오던 육안검사 외에 변압기에 대한 객관적 데이터를 보여주고 이를 분석해 고장 위험도도 알려주니, 변압기를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서 믿음이 갈 수밖에 없죠.”
솔루션을 기획하고 개발한 한전 신재생사업처와 한전 전력연구원 디지털솔루션연구소는 변압기의 현황과 데이터 이력을 전달하는 현재 서비스에서 진일보한 연구과제를 준비하고 있다. 변압기의 현 상태를 알려주는 것을 넘어 이상 신호가 감지될 시 담당자에게 이를 알리고, 나아가 변압기가 언제, 어떻게 고장날 것인지에 대한 예측까지 제공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것. 이와 함께 아파트 단지 변압기의 관리 책임에 대한 인식 개선까지 함께 한다면 솔루션의 파급 효과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본 사업의 총 책임자인 신재생사업처 김경환 부장은 말한다. 이대로라면 아파트 단지 내 변압기 고장과 과부하로 인한 정전이 사라진 우리나라를 만날 수 있는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최재원 차장이 전용학 전기과장에게 솔루션의 웹 화면 구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재원 차장과 전용학 전기과장이 개발한 솔루션의 모바일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