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보기

빛으로 여는 세상

2022 JAN+FEB VOL.45

OPENING
: O의 발견


자 리

숫자들이 처음 생겨났을 때, 그곳에 0은 없었다.

0이라는 숫자와 개념이 없었으므로 곧잘 곤란한 상황이 생겨났다. 가령, 303을 나타낼 때 0이 없었으므로 3과 3 사이에 공간을 두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사람들은 33원과 303원을 구분하지 못해 그 사이에서 자주 혼동했다. 33원이어도 상관없는 이들은 태평했고, 303원이어야 했던 이들은 억울했다. 당시 숫자에 민감한 이들은 주로 상인이었는데, 그래서 숫자 0을 발견한 것도 상인이었다. 상인들은 오직 숫자와 숫자 사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0을 만들었고, 0에게 존재감을 부여했다.

그런데 사실은 더 오랜 고대에도 빈자리를 의미하는, 그러니까 0의 의미는 존재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점토판에 새겨진 쐐기 문자를 해석해보면 0에 해당하는 기호가 있었고, 이 기호는 수를 표기할 때 비는 자리를 채우는 기호로 쓰였다. 마야문명에서는 그림문자로 숫자를 나타내는 방법이 있었는데, 0을 ‘아래턱에 손을 괸 얼굴’ 모양으로 아주 재미있게 표시했다.

그러다 6세기 초, 빈칸 대신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그들의 언어에 있던 슈나(sunya)라는 말에 해당하는 작은 동그라미(●이나 ○)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0은 그때 그 모양과 형태에서 가져왔다. 이때부터 0의 존재감은 조금씩 선명해졌고, 빈칸 대신 0을 써넣음으로써 숫자의 의미와 전달력도 명확해졌다.

0은 빈자리지만, 비어있지 않은 숫자다.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 등으로 자연 생태계에도 빈자리가 드문드문 생겨나고 있다. 그 자리도 오래전의 숫자 0과 마찬가지로 빈자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어있지 않으며, 비어있어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