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긴 날개를 가진 새에서 어느 순간 현대 플라스틱 문명의 파열을 상징하는 새가 된 알바트로스. 어디선가 한 번쯤 보았을 이 사진은 미국 출신 사진작가 크리스 조던(Chris Jordan, b.1963)이 8년에 걸쳐 작업한 ‘미드웨이: 가이아의 메시지 (Midway: Message from the Gyre)’ 연작 중 하나다. 이 작품을 통해 인류가 만들어 쓰고 버린 것들이 우리의 시계를 벗어난 태평양 외딴 섬에서 자연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음을 알리고자 했다. 이전까지 이토록 강렬한 충격을 던져준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기에 크리스 조던은 곧 세계적인 생태사진작가로 떠올랐다.
기후위기가 가속화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도래가 임박하면서 예술 분야에서 ‘환경’이란 주제는 더 이상 변방의 장르가 아니라, 작가들의 주요한 세계관이 되었다. 사진과 비디오아트, 영화를
넘나들며 이 시대의 주요 담론과 이슈를 보여주고 있는 크리스 조던은 처음부터 환경운동을 위해 나섰던 작가가 아니었다. 그에게 가장 큰 화두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였다. 오래전부터 자본주의
대량소비사회의 균열 양상을 목도해온 작가는 ‘아름다움의 발견’을 희망의 끈으로 제시하고 있다.
크리스 조던은 프로젝트에 따라 다양한 사진기법을 구사하면서도 일관된 미학적 지향을 드러낸다. 문명의 파열을 아름답고 비통하게 보여준 ‘미드웨이’ 연작,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보헤미아 숲
‘슈마바’ 연작, 인류세의 거대한 소비문화를 압축한 ‘견딜 수 없는 아름다움’ 연작, 명화마저 집어삼킨 플라스틱 세상 ‘숫자를 따라서’ 연작 등 크리스 조던의 비틀지 않고 명료한 사진 세계는
단숨에 우리의 무뎌진 의식을 일깨웠다.
크리스 조던이 변호사에서 전업 사진작가로 들어선 초기, 그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인류문명의 부산물이 보여주는 아름다움, 그 ‘견딜 수 없는 아름다움 (Intolerable Beauty)’이었다. 작가는 ‘숫자를 따라서(Running the Numbers)’ 연작을 통해 현대 대량소비사회의 소비 주체로 살아가는 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통계수치의 무게를 잘 알려진 명화들을 차용해 보여준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작품들이 다가서서 보면 인류문명의 폐기물로 채워졌음을 알게 될 때, 그 거리감과 선명한 간극만큼 우리의 의식도 또렷이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크리스 조던은 이 작업과 병행해 극지방보다 더 멀리 떨어진 태평양 한복판 미드웨이 섬을 8년간 오가며 알바트로스의 삶과 죽음을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로 담아냈다. 이 작품들은 고발이나 비난이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으로 죽어간 새들을 위한 진정한 애도와 사랑의 표현이다. 크리스 조던의 사진과 영상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결코 미적 감동 그 자체로 끝날 수
없는 애도와 웅숭 깊은 사랑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미드웨이 시기를 지나면서 크리스 조던은 아름다움의 문제와 생명의 근원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천착한다. 2018년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슈마바 숲을 담은 작품 역시 멂과 가까움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가까이 다가서면 인간의 마을에서 점점 멀어진 숲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경제 활동을 위한 벌목과 식재의 반복으로 가늘어진 나무들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크리스 조던은 2019년 서울에서 시작된 작가 최초의 대규모 개인전 <크리스 조던: 아름다움 너머 Chris Jordan: Intolerable Beauty> 전국순회전을 통해 국내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 부산, 순천, 제주, 울산, 전주에서 펼쳐진 순회전에는 10만여 명이 다녀갔다. 진실을 직시하면서도 아름다움의 가치를 잃지 않는 크리스 조던의 작품들은 관객에게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와 닿는 힘이 있다. 그의 사진 작품과 영상을 보고 난 관객들이 보여준 사뭇 특별한 리액션이 그 증거일 것이다. 관객들의 요청으로 시작된 방명록 릴레이는 전시 기간 내내 이뤄졌고, 거기에는 여섯 살 꼬마부터 팔순의 어르신까지, 그들의 진심이 그림으로, 글로, 한글로, 프랑스어로 꾹꾹 눌러 담겨있다. 그의 전시는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을 만나 아름다움 너머의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