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와 와인 메인 이미지

테마 에세이

인류가 기대어
살아 온
흙이라는 보금자리

인류의 생활은 자연환경을 토대로 사회경제적 요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계승되었다. 지형, 기후, 토양과 같은 자연적 요인은 인류의 생활 문화를 결정하는 기본 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토양에 집중해보자. 토대가 다를 진데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세계의 토양과 생활, 그리고 시선을 안으로 돌려 우리 땅의 특징까지 두루 돌아본다.
글 자료 이완주(토양병원 원장) 정리 편집실

유럽은 석회질 토양이 많아 깨끗한 물을 쉽게 구할 수 없어 음료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흙의 영향으로 유럽은 다양한 생수가 발달하였고, 독일은 물 대신 마실 정도로 맥주가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이와 더불어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크게 발달한 것이 바로, 와인이다. 와인은 다른 술과는 달리 제조과정에서 물이 전혀 섞이지 않아 포도 성분이 그대로 살아 있는 술이다. 그러므로 와인의 맛은 포도가 자란 지역의 토질, 기온, 강수량, 일조시간 등 자연적인 조건과 포도 재배 및 양조법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때문에 나라, 지방마다 와인의 맛과 향이 다른 것이다. 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는 품종에 따라 가장 이상적인 토양이 있다. 예를 들어 ‘가메 누아르 아 쥐 블랑(Gamay Noir a Jus Blanc)’이라는 품종은 화강암 토양에서는 섬세하고 육감적인 포도주를 만들고, 진흙 석회질 토양에서는 훨씬 부드럽고 가벼운 포도주가 된다. 프랑스에서도 보졸레, 앙주, 뚜렌느, 싸브와 지방 등에서 이 포도를 재배하는데, 생산 후 바로 마실 수 있는 과일 향미를 지닌 와인을 생산하는 게 특징이다. 이처럼 토양은 포도, 나아가 와인의 맛과 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1935년 AOC법(원산지 명칭통제)을 제정하여 와인의 철저한 품질관리를 통해 세계적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커피와 커피를 수확하는 사람 이미지

세계인의 기호식품인 커피는 어떨까. 일단 기본적으로 커피는 까다로운 생육조건을 필요로 한다. 하루 2~3시간의 강렬한 햇볕, 그리고 그 햇볕을 가리는 그늘이 되어 줄 큰 나무, 섭씨 18~20도 사이의 적당히 큰 일교차, 건기와 우기, 그리고 커피나무가 자라기에 적절한 토양이 필요하다. 경작 고도는 약 800m 이상, 물이 고이지 않는 촉촉하고 비옥한 땅, 화산재가 덮여 배수가 잘되는 화산성 충적토이되, 암반층이나 지수층 위에 있어 건기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커피 생산이 가능한 지대를 ‘커피벨트’라 부르고, 그 지역에서도 산지의 이름을 딴 커피콩이 나오며 그 맛을 구분하는 것이다. 산지의 이름이 곧 농산물의 품질을 보증하는 사례도 있다. 바로, 캄보디아의 캄포트(Kampot) 후추다. 이 지역에서 나는 후추는 캄보디아 농작물 최초로 GI(지리적 상표표시)에 등록돼 그 지역명이 상표권처럼 보호받는다. 땅에서 20~25년 정도 길러내야 실하고 풍부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후추는, 기르는 기술보다 자라는 토양이 더 중요하다. 캄포트의 토양은 후추를 재배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으로, 직사광선에 취약해 주변에서 흔히 자라는 팜나무 가지를 이용해 그늘을 만들어준다. 매년 4~6월경 수확하는 캄포트 후추는 평균 1헥타르당 2톤 정도의 후추가 생산되어 그 품질을 자랑한다.

흙과 집 이미지

흙과 인류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식생활과 더불어 빠뜨릴 수 없는 게 바로 집이다.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는 아라완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척박한 모래밭 한가운데에서도 수백 년간 살아왔다. 모래 언덕 깊숙한 곳에서 진흙을 파내 사원을 세우고 거센 모래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단순하지 만 견고한 집을 지었다. 그중 하나가 징가레베 사원이다. 한편, 중국의 화안현에는 대지촌 흙집이라 불리는 대형 생토 건축물이 있다. 이 건축물의 굳기와 단단함은 독특한 건축재료에 의해 결정된 것인데 폭탄으로도 파괴하기 어렵다고 한다. 바로 살아있는 흙, 유기질이 풍부한 생토에 달걀 흰자위, 선지와 익힌 찹쌀 등으로 섞어 발라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하라 사막 마을의 집과 더불어 오래 전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같은 지구라도, 인류가 발 디딘 곳의 흙의 성질이 다르고, 같은 흙이라도 지역의 기후, 풍습, 문화에 따라 사람이 어떻게 활용하고 변화시키느냐에 따라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생활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까이 눈을 돌려 한반도를 살펴보자. 서해는 ‘머드’로 통칭되는 갯벌이, 전남 무안으로 유명한 황토가 나는 우리 땅은 동쪽 산악지대에서는 밭농사가 적합하고, 중부 이남의 평야지대에서는 벼농사가 활발히 이뤄지는 토양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토양비료학자이자 세계 최초의 토양병원 원장 이완주 박사는, 사실 한국의 흙이 토양학적으로 보았을 때 약점이 많다고 말한다. 토양을 전문적으로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그가 밝히는 우리 땅 이야기를 들어 보자.

농사짓는 모습과 쌀 이미지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한 토양학자가 질문을 하나 던졌다. “한반도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이렇게 척박한 흙에서 어떻게 먹고 살아왔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옥토(沃土, 비옥한 흙)’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 흙은 자랑할 점이 별로 없다. 우리 흙의 약점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양분(비료) 저장능력이 작다는 것이다. 간단히 비유해서 우리 흙이 저장할 수 있는 양분은 겨우 10개인데 비해, 미국 흙은 100개까지 저장할 수 있다. 미국 흙의 모암은 ‘몽모리오나이트’ 인데 비해, 우리는 ‘카오리나이트(고령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흙 속에는 먼 옛날 북극에서 굴러온 빙하 속의 유기물이 많기 때문에 양분도 많고 저장능력도 크다. 이에 우리는 미국의 토양학자에게 이렇게 답할 수 있겠다. 장날 망태기 가득 쇠전에서 쇠똥을 얻어오거나, 우리에서 키우는 가축의 분뇨를 이용했노라고. 쇠똥과 같은 유기물은 양분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미국 흙의 2.5배, 우리 흙보다는 25배 크다. 우리 조상들은 척박한 농토를 이렇게 지혜롭게 가꿨다. 이후 1970년대, 통일벼가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농사꾼은 비료를 매우 조심스럽게 주었다. 재래 벼에 비료를 조금만 많이 줘도 쓰러지거나 도열병이 나 쌀농사가 폐농되곤 했다. 이처럼 농토가 양분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 이상 비료를 주면 과부하가 걸리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흙도 과식이 원인인 줄은 거의 모르고 있다. 옛 사람들처럼 잘 발효된 퇴비만 주어도 문제가 해결될 터인데, 그걸 모르고 있다. 이에 빗대어 보건대 지구의 토양을 살리기에 앞서 우리 흙을 먼저 잘 알고 가꾸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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