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는 영화관
겨울의 빛깔 위에 투영된 순수한 사랑
차갑고도 순수한 계절의 모습을 잘 담아 낸 겨울영화
겨울이라는 말은 ‘머물다’라는 의미의 ‘겻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추위 때문에 집안에 머무는 일이 많은 계절, 겨울. 문득 들었을 땐 차갑게만 느껴지지만 그 뜻을 음미해보면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단어인 셈이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도 겨울은 추위와 고난의 배경으로 쓰기도 하지만 따뜻하게 또는,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순수한 사랑의 배경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글 송경원(씨네 21 기자, 영화평론가)
겨울의 색이라고 하면 누구나 흰색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고요한 세상. 세상 모든 소음을 먹어버린 채 오직 햇볕만을 시린 빛으로 반사하는 눈 덮인 세상은 생명도 가만히 숨을 죽이는 겨울에 어울린다. 하지만 흰색은 그저 하나의 색이 아니다. 눈의 색깔을 수십 개로 구분하고 표현한다는 이누이트인 정도는 아니라 해도 채도와 질감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표현될 수 있다.
<러브레터>는 등산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약혼자를 잊지 못하는 히로코(나카야마 미호)가 연인의 옛 흔적을 더듬어 가며 비로소 그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연인 후지이 이츠키의 2주년 추모식을 위해 홋카이도 오타루에 머무르던 히로코는 약혼자와 이름이 같은 중학교 여자 동창의 존재를 알게 된다. 자신과 꼭 닮은 그녀가 사실 약혼자의 첫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비로소 히로코는 사별한 연인을 떠나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히로코의 복잡한 심정을 한 두 마디 말로 정리할 순 없을 것이다. 단지 첫 사랑을 닮았다는 이유로 자신과 만난 건 아닌지 떠나간 연인에게 묻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처 하지 못한, 할 수 없는 말들을 모두 삼키고 히로코는 외친다. “잘 지내고 있습니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남자친구를 앗아간 산이 한눈에 보이는 설원을 가득 메우는 히로코의 간절한 메아리. 이 장면에서 세상을 뒤덮은 흰색은 모든 기억과 아픔까지 묵묵히 삼키고 묻어주는 치유의 색이다. 자연광을 최대한 살린 설원의 빛깔은 마치 물감처럼 마음의 얼룩마저 덮어주는 것만 같다. 홋카이도의 겨울을 다채롭게 담아낸 <러브레터>는 겨울을 지나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영화 내내 하나의 흰색으로만 가득 채워졌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흰색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면 <러브레터> 속 설원의 색은 시리기보다는 차라리 포근한 위안의 색이라고 부르고 싶다. 모닥불에 몸을 녹이는 붉은 빛, 첫사랑의 기억처럼 뽀얀 햇살의 색을 거친 다음에야 모든 걸 덮어주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설원의 색이 허락된다.
“겨울에 눈이 왜 내리는 줄 아니?” 겨울은 동화의 계절이다.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하여 모닥불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밤에는 마음을 데워줄 이야기가 필요한 법이다. <가위손>은 할머니가 손녀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작한다. 할머니가 소녀였던 시절, 마을에 가위손을 가진 에드워드(조니 뎁)가 나타난다. 에드워드는 외딴 성에서 살던 박사가 창조한 인조인간이다. 사람들은 신기한 재주를 가진 에드워드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이내 이질적인 존재인 그를 두려워한다. 반면 에드워드가 한 눈에 사랑에 빠진 소녀 킴(위노나 라이더)는 처음엔 에드워드를 낯설어 하지만 점점 그의 순수함을 깨닫고 마음을 연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에드워드가 킴을 위해 얼음을 조각하는 순간이다. 눈처럼 흩날리는 얼음가루 밑에서 소녀가 춤추는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투명하게 한다. 이후 에드워드는 공포에 선동당한 마을사람들에게 몰려 외딴 성으로 쫓겨 도망가고 자취를 감춘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된 킴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에드워드가 얼음을 눈으로 만들어 마을로 뿌려주고 있기 때문에 눈이 내리지 않았던 마을에 그 이후 매년 눈이 내리고 있다고. 동화는 그렇게 완성된다. <가위손> 속 겨울의 빛깔은 그래서 차갑기보다는 따뜻하다. 팀 버튼 감독의 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구현된다. 하나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처럼 원색이 강조된 총천연색의 세계, 나머지 하나는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처럼 모노톤으로 처리된 흑백영화의 세계다. <가위손>은 두 가지 모두를 활용한 다. 마을은 색으로 넘쳐나는 반면, 에드워드의 세계는 흑백영화처럼 무채색으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에드워드의 창백한 피부와 얼어붙은 심장이 도리어 따스하게 느껴질 것이다. 겨울의 색은 차가움이 아니라 온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하고 싶다. 팀 버튼 감독은 설레고도 안타까운 그 모순적인 감정을 컬러와 흑백의 대비를 통해 절묘하게 표현한다. 화사하고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겨울이 생각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