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배영재 봉사자, 김민철 대리, 기우진 대표, 전혜민, 신욱현, 권병훈 봉사자

작품을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배영재 봉사자, 김민철 대리, 기우진 대표, 전혜민, 신욱현, 권병훈 봉사자

행복한 동행

페이퍼캔버스에 그린
기쁨과 희망

러블리 페이퍼

폐지 줍는 어르신들에게 유독 눈길이 갔다. 생활고로 전공 서적을 팔까 말까 고민하던 과거의 자신과, 종이 박스를 손에 든 그분들이 겹쳐 보였다. 서로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자 몸과 마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시중가의 10배로 사들인 폐지를 활용해 캔버스를 만들었고, 작품의 수익금으로 또 다시 어르신들을 도왔다. 러블리 페이퍼 기우진 대표의 사연이다
강진우(자유기고가) 사진 이원재(Bomb Studio)

페이퍼캔버스의 주재료인 폐박스의 상태를 점검하는 왼쪽 기우진 대표와 권병훈 봉사자

페이퍼캔버스의 주재료인 폐박스의 상태를 점검하는 왼쪽 기우진 대표와 권병훈 봉사자

폐지 줍는 어르신들을 위한 ‘사회적 예술 플랫폼’
러블리 페이퍼가 만드는 캔버스는 여느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일반적인 캔버스는 나무틀에 천을 씌워 만드는데, 러블리 페이퍼의 캔버스는 상태가 좋은 폐박스를 잘라 세 겹으로 겹친 뒤 그 위에 천을 씌운다. 그래서 이름도 페이퍼캔버스다. 색다른 방식으로 제작되기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정이 다르다. 가운데가 뚫려 있어 천을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하는 일반 캔버스에 비해, 페이퍼캔버스는 두툼한 종이가 천 바로 아래에 깔려 보다 세밀한 작업이 가능하단다. 여기까지 들으면 러블리 페이퍼가 아이디어 상품을 들고 나오는 일반적인 스타트업 기업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을 돕는 이른바 ‘사회적 예술 플랫폼’, 이것이 바로 러블리 페이퍼의 정체성이다. 원래 러블리 페이퍼는 3개월짜리 단기 프로젝트였다. 2016년 1월, 기우진 대표는 후배 권병훈 씨, 그리고 뜻 있는 대학생 5명과 힘을 합쳤다. 폐지로 만든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 수익금으로 어르신들을 돕자는 게 프로젝트의 주요 골자였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페이퍼캔버스가 탄생했다. 이제 문제는 그 위에 작품을 그려 줄 작가를 구하는 것이었다. 기우진 대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SNS에 프로젝트 내용을 올리고, 재능기부를 해 줄 작가를 모집했다. 그런데 얼마 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무려 150여 명의 작가들이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선뜻 나선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뜻을 모아 주실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얼떨떨한 기분으로 페이퍼캔버스를 만들려는데 3개월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프로젝트 기간을 1년으로 늘렸어요. 그런데 저희의 아이디어를 눈여겨본 많은 지인들이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해도 좋을 만한 프로젝트’라고 조언해 주시더군요. 결국 고심 끝에 러블리 페이퍼를 ‘사회적 예술 플랫폼’으로 격상시켰고, 지금에 이르게 됐죠.”

종이 기부를 통해 모인 후원금으로 단순한 생필품 전달을 넘어 살가운 말동무가 되어주는 일.
러블리 페이퍼가 지향하는 미래이자 오늘이다.

(왼쪽)1호 캔버스 크기에 맞춰 폐박스를 자르는 기우진 대표, 신욱현 봉사자  (오른쪽)재능기부 작가가 그린 페이퍼캔버스 작품들

(왼쪽)1호 캔버스 크기에 맞춰 폐박스를 자르는 기우진 대표, 신욱현 봉사자 (오른쪽)재능기부 작가가 그린 페이퍼캔버스 작품들

종이에 실려 퍼지는 나눔의 정신
따지고 보면 종이를 매개로 한 기우진 대표의 나눔은 지난 2013년부터 시작됐다. 일찌감치 결혼을 하고 독립까지 한 탓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전공 서적을 팔아야 할지 고민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재활용 칸을 가득 채운 종이 쓰레기를 목격했다. ‘저것들을 판 돈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스치듯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구체화할 여력도, 명분도 없었다. 그러다가 대안학교인 푸른꿈비전스쿨의 사회 및 한국사 교사로 일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폐지 줍는 어르신들을 발견하고는 그 시절의 단상을 떠올린 것이다. 그때부터 폐종이를 모아 판 돈으로 어르신들에게 각종 생필품을 지원하는 ‘종이 기부’를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인천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폐종이를 기부 받았다. 그러나 이 같은 활동만으로는 어르신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아이디어가 바로 페이퍼캔버스다. 어르신들이 최저 시급에 준하는 수입을 얻으려면 폐지값이 시중 가격의 10배 정도는 돼야 했기에, 10배를 주고 폐지를 구입했다. 여기에 부가 가치를 발생시킨 뒤 어르신들에게 환원하기 위해 나눔에 뜻이 있는 작가들의 재능을 빌렸다. 러블리 페이퍼는 이렇게 얻은 수익금으로 인천 내 폐지 줍는 어르신 7명을 정기적으로 지원한다. 크라우드 펀딩과 종이 기부를 통해 모인 후원금으로는 1년에 한 번씩, 관내 어르신 20~30명에게 쌀이나 방한복 등 ‘생필품 꾸러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흐르자, 김민철 대리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저희는 단순히 물품만을 전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어르신들은 생필품보다는 꾸준히 찾아와 줄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한두 달에 한 번씩 지원 대상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친손자, 친손녀처럼 살갑게 말동무를 해 드립니다. 물질적 지원과 함께 정서적 지원도 제공해 드리는 것이죠. 저희를 반갑게 맞이하시면서 ‘좀 자주 와!’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죄송하면서도 이 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듭니다.”

(왼쪽)페이퍼캔버스 만들기에 열중하는 전혜민 봉사자, 기우진 대표, 신욱현 봉사자  (오른쪽)작업을 마치고 간식타임을 가지는 러블리 페이퍼 직원과 봉사자들

(왼쪽)페이퍼캔버스 만들기에 열중하는 전혜민 봉사자, 기우진 대표, 신욱현 봉사자 (오른쪽)작업을 마치고 간식타임을 가지는 러블리 페이퍼 직원과 봉사자들

기분 좋은 망함을 간절히 고대하다
사업 모델이 최근에야 정립된 만큼, 러블리 페이퍼의 규모는 아직 영세하다. 직원도 김민철 대리 한 명이다. 그러나 외롭게 걷지는 않는다. 러블리 페이퍼의 뜻에 동참하는 봉사자들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권병훈 씨는 얼마 전까지 러블리 페이퍼의 공동 대표였다. 지금은 비록 다른 꿈이 있어 러블리 페이퍼에 적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서 페이퍼캔버스 만들기를 거든다. “치매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곁에 머무르면서 폐지를 줍던 한 할머니가 따님 집으로 들어가셨는데요. 얼마 뒤에 돌아오셔서 다시 폐지를 줍고 계신 거예요. 왜 다시 이 일을 하시냐고 여쭸더니 활동을 안 하면 병날 것 같아서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르신들에게도 ‘일하는 보람’이 중요했던 겁니다. 다만 폐지 줍기는 위험하고 힘든 일이라 문제였던 것이죠.” 기우진 대표 또한 할머니를 지켜보며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러블리 페이퍼 2.0’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러블리 페이퍼 2.0의 테마는 ‘고용’이다. 폐지 줍는 어르신, 학교 밖 청소년, 경력 단절 여성 등을 직원으로 두고,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다. 이 단계가 안정화되면 사회 문제와 작품을 연결하는 한편, 폐지 줍는 어르신들의 현황을 빅데이터화한 소위 ‘폐지맵’을 만들어 지역 맞춤형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러블리 페이퍼 3.0’을 출범시킬 예정이다. “현재 저희는 아시아소셜벤처경진대회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여기서 입상하면 세계소셜벤처경진대회에 나갈 수 있어요. 저희의 사업 모델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봅니다. 또 예비 사회적 기업 인증도 준비하고 있는데요. 예비 사회적 기업이 되면 인건비가 지원됩니다. 바로 이 시점이 러블리 페이퍼 2.0의 출발점으로 작용하겠죠.” 러블리 페이퍼의 미래를 그려 나가던 기우진 대표가 불현 듯 “우리는 망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선언한다. 러블리 페이퍼를 탄생케 한 사회문제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기업의 존재 의미가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기분 좋은 망함’을 기꺼이 맞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토록 유쾌하게 폐업을 이야기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해맑게 웃음 짓는 기우진 대표를 보고 있자니, 슬며시 희망이 솟아오른다. 러블리 페이퍼가 비록 우리나라의 모든 사회문제를 없앨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들로 인해 폐지 줍는 어르신들의 처우가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러블리 페이퍼에서 작품 구매 및 봉사 문의를 기다립니다. 종이를 매개로 따뜻한 나눔을 전하고 싶은 분은 러블리 페이퍼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문의 032-514-0109 홈페이지 loverepaper.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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