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온도
역사 공감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독립과 민주를 만나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일제에 의한 강제점령의 아픔을 기억나게 하는 곳이다. 그와 동시에 절망의 한 가운데서도 미래를 향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의 열망을 간직하는 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계승을 위한 배움터로 남아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글 편집실 일러스트 하고고
독립을 향한 열망을 다시 느껴보다
3월이 시작되는 3월 1일, 삼일절. 삼일절이 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하얀 저고리와 검정치마를 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소녀, 유관순 열사이다. 열여덟 살의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는, 삼일만세운동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그런 유관순 열사가 마지막으로 지냈던 곳이 서대문형무소이다.
한일합방이 이뤄지기도 전인 1907년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 문을 닫을 때까지 80년 동안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쳐 갔고, 일부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유관순 열사뿐 아니라 김구, 안창호, 한용운, 윤봉길, 여운형, 함석헌, 홍명희, 조봉암 등 이곳에 갇혔거나 옥사한 독립운동가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오히려 이곳에 갇히지 않았던 애국지사들을 찾는 편이 훨씬 빠를 정도다. 초기 80평 규모였던 형무소는 삼일운동 이후 15,000평으로 확장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지하 감옥에 있는 고문실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가혹한 고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白凡逸志)>를 통해 이곳의 감방 모습과 일본인 간수들의 횡포, 독립투사들의 고통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가지를 제대로 뻗지 못한 미루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나무를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행 집행 직전 독립운동가들이 나무 앞에 멈춰서 통곡을 했다고 전해진다. 독립운동가들의 한이 서려 있는 나무는 여전히 서대문형무소를 지키고 있다.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이 퍼져나갔던 곳
또한 서대문형무소는 독립을 향한 민족의 저항정신이 살아있는 곳인 동시에 군사정권의 어두운 이면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권위주의와 독재가 횡행하던 시절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을 받은 수많은 민주인사가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4·19혁명 때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붙잡혀 온 곳이기도 하며, 군사정권 시절 간첩 협의로 체포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시간이 지나 무죄판결을 받은 인혁당사건의 주인공들이 사형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후 동베를린사건, 민청학련사건 등 시국사건으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옥고를 치렀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여섯 차례나 수감되었던 문익환 목사와 리영희, 함세웅, 김지하, 장준하, 천상병, 백기완 등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민주인사들 또한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현대사의 최대 증인답게 1987년 6월 항쟁 기간 수많은 청년 학생들을 가두었다.
이후 1987년 11월 15일 서울구치소(서대문형무소의 옛 이름)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문을 닫았다. 감옥으로서는 수명이 끝났지만 ‘현대적 형무소 건축’의 전형, 즉 감시하기에 가장 편하게 만든 파놉티콘(원형 감옥) 형식을 갖춘 옥사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1998년 역사적 의의를 밝히고 독립과 민주의 현장으로서 교육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이곳에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의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재탄생하였다. 우리 민족이 살아온 시대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