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영화관

서로에게 한발 더 다가가기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다. 생각, 감정, 생김새마저도 모두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공감은 의외로 사소한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따뜻한 시선, 짧은 추임새, 때로는 긍정의 고갯짓 하나로 어색했던 관계에 변화가 시작된다.
송경원(씨네 21 기자, 영화평론가)

첫만남의 두근거림이 넘치는 영화 500일의 썸머 한장면

서로를 길들이는 유일무이한 관계에 대하여 <워낭소리>
<워낭소리>는 여러 가지로 이례적인 영화였다. 한국 다큐멘터리가 290만 관객을 동원한 건 전례가 없던 기록이다. <워낭소리>로 인해 다양성 영화,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이 확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산술적인 수치보다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점이 더 이색적으로 기억된다. 특히 당시의 흥행은 젊은 관객층의 관람이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이는 그 즈음 힐링 열풍과 맞물리며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사회의 압박 속에서 한 숨 쉼표 같은 시간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워낭소리>는 산골의 노부부와 그들이 키우는 나이 먹은 소의 마지막 몇 년간을 다룬다. 이 소박하기 그지없는 사연에 사람들은 왜 발길을 옮겼을까. 무엇이 그토록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워낭소리>의 할아버지는 도시인들과 다른 시간을 산다. 말동무 찾기도 힘든 벽지에서 소는 도구이자 재산인 한편 친구이자 가족이다. 그 소가 수명을 다해갈 때 할아버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줄 따름이다. 어쩌면 별 것 아닌 일. 하지만 그 별 것 아닌 행동과 시간, 상대를 위해서 온전히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한다는 행위를 일분일초가 바쁜 요즘 세상에서는 쉽게 실행하기 어렵다. <워낭소리>의 카메라는 그렇게 현대인들이 매일같이 도는 쳇바퀴와는 다른 시간을 찍는다. 이 평범한 기록은 사실 이야기랄 것도 없다. 경북 봉화 산골에 사는 할아버지가 소와 함께한 마지막 시간을 담담하게 보여줄 따름이다. 그 빈 시간, 어쩌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을 보며 우리는 각자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다.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를 굳이 사람과 소의 우정 정도로 한정해서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두 존재 사이의 교감은 마치 <어린왕자>에 나오는 왕자와 여우의 관계처럼 유일무이하다. 슬쩍 곁에서 바라보는 우리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혹은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울림을 남길 수 있는 비결은 거기에 있다. 열린 이야기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

세상을 바꾼 시작점, 여행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사진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행복한 우화 <주토피아>
동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의인화된 동물들이다.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상상은 꽤 흥미로운 접근이다. 단순히 동물이 말을 한다는 차원을 넘어 인간사회의 어두운 면과 모순까지 담아낼 수 있어야 굳이 이런 상상까지 동원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토피아>는 재미와 귀여움 이상으로 생각할 거리를 안기는 애니메이션이다. 거의 풍자극이라도 해도 좋을 이 발랄한 이야기는 동물들이 주인이 된 세상 주토피아에서 시작된다. 동물원(ZOO)과 낙원(Utopia)의 합성어인 ‘주토피아’는 이름 그대로 초식, 육식, 대형, 소형 가릴 것 없이 모든 동물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도시다.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토끼 주디 홉스는 초식동물은 불가능할 거라는 편견을 넘어 어엿한 경찰이 되고 주토피아로 이사한다. 하지만 주토피아는 그 이름처럼 모든 동물의 낙원은 아니다. 경찰이 되고 싶었던 주디의 꿈을 비웃었던 것처럼 그 안에는 종에 따른 크고 작은 차별이 존재한다.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주디는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하지만 동료 경찰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채 주차 단속반에 배치된다. 그러던 중 주토피아에 원인 모를 실종 사건이 발생하고 주디는 우연히 엮인 사기꾼 여우 닉과 함께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여우와 토끼의 콤비라는 발상 자체도 재미있는데 버디무디처럼 투닥거리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닉과 주디의 행보는 보는 이를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 영화의 핵심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 편견과 차별을 허무는 데 특별한 비결 같은 건 없다. 미숙하고 상처를 간직한 토끼와 여우가 서로의 부족한 면을 발견하고 종족 간의 편견과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이야말로 주토피아가 진정한 동물들의 낙원으로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람사는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토피아는 얼핏 봐도 다민족국가인 미국사회의 축소판 같다. 인종, 출신, 문화가 다른 이들이 도시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필수적이다. 이를 딱딱하게 설명하고 호소하면 얼마나 지루할까. 우리에게 <주토피아> 같은 따뜻한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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