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화보
한 컷에 담긴 우리 삶의 곡식
우장춘 박사는 말했다. “씨앗은 하나의 우주다.” 작은 공간 안에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 움튼다.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나 생명을 먹여 살리는 식량이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와 가까운 곡식, 4가지에 담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본다.
글 편집실 사진 이원재(Bomb Studio)
한국인의 오랜 원동력 쌀
1998년, 충북 청원군에서 작은 볍씨 몇 톨이 발견되었다. 유전자 분석결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만 3000년~1만 5000년 전의 볍씨로 밝혀졌다. 흔히 벼농사는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래된 것이 통설이었는데, 이를 뒤집는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시작된 벼농사는, 이후 단단한 도구의 발명으로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점차 벼는 껍질을 벗고 쌀이 되어 식량으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씨족사회에서는 권위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고 나눠주는 사람, 즉 요리사가 바로 재상이었다.’ 이는 농사를 세상의 근본으로 여겼던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쌀농사는 곧 생활이었고 부의 상징이었다. 전쟁 이후, 쌀이 부족하던 시기 나라에서는 혼분식 장려운동을 펼치며 쌀의 소비량을 제어하기도 했다. 1970년대 에 이르러 통일벼 등 쌀 품종 개량을 통해 이후 비로소 쌀 자급률 100%에 도달한다. 혼분식이 폐지되고 막걸리 제조에도 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누구나 쌀밥을 누리는 세상이 되었지만 1인당 쌀 소비량은 점차 줄어들었고, 1994년 이후 매년 여의도 면적 55배의 농지가 사라지고 있다. 쌀자급률이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우리 쌀이 사라지면 밥상에 대한 감각이, 먹을거리와 농사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쌀 베이킹이나 쌀 피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쌀을 소비하려는 노력이 일고 있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밥심’으로 대변되는 한국인의 원동력은 우리 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왼쪽부터) 쌀을 뜻하는 한자 米는, 여덟 八자가 두 번 들어간 형상이다. 수확하기까지 여든 여덟 번의 정성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평사리는 노랗게 익은 벼로 가득하다. 대한제국부터 광복까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속에서 고봉으로 올린 흰 쌀밥은 곧 재력의 상징이었다. KBS1에서 방영하는 <한국인의 밥상>은, 쌀을 주식으로 한 우리나라의 다양한 음식이 등장한다.
먹거리로 즐길거리로 밀
지금은 쉽고 흔하게 볼 수 있는 단팥빵. 그러나 광복 이후 국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고 상류층에서만 가끔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간식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로 우리나라에 밀가루 공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라면과 함께 빵이 밥을 대신할 대중 식품으로 떠오른다. 미국의 밀가루 원조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바로 도시락이다. 당시 부족한 쌀의 자리를 잡곡이나 밀가루로 대체하기 위해 정부는 대대적인 혼분식 장려운동을 펼친다. 면과 빵 요리가 발달하고 소비도 늘어난다. 더불어 인구 50만 명 이상 도시에 ‘분식 센터’를 세우는데, 영업허가 취득을 쉽게 완화하고, 무허가 요식업소가 전업시 허가를 내주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당시 분식센터에서는 디스크 자키를 고용하여 신청곡을 받고 틀어주는 등 청소년 사이에서 소위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모습은 1970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쌀의 자급률이 올라간 뒤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밀가루 음식을 즐기게 되었다. 제과제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집에서 밀가루로 직접 빵을 굽는 사람도 많고 꿈이 파티시에, 제과사인 아이들도 속속 생겨났다. 그러는 사이 우리 토양에서 자라던 우리 밀의 자리는 조용히 사라져갔다. 우리 밀을 작은키에 빗대어 ‘앉은뱅이밀’이라 부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키는 작지만 우리 몸에 잘 맞는다. 일반 밀보다 글루텐 함량이 적어 빵으로 만들기엔 부푸는 성질이 약하지만 대신 소화가 잘 된다. 더불어 병충해에도 강해 농약도 필요 없다고. 밀가루 음식을 마냥 멀리하기보다는 우리 몸에 좋은 우리 밀을 섭취해보는 것은 어떨까.
(왼쪽부터) 정확한 계량을 생명으로 하는 베이킹. 예나 지금이나 간식으로 빵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특히, 주식으로 먹는 심심한 맛의 유럽의 빵보다는 간식으로 제격인 달달한 일본식 빵, 단팥빵 등이 오래 전부터 사랑받았다. 라면 또한, 밀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다. 국내 1호 라면은, 1963년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해 개발한 ‘삼양라면’으로 혼분식 장려운동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라면 돌풍을 일으켰다.
건강을 가득 담은 콩
전 세계 주요 콩 품종의 원산지가 한반도 일대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학계에서는 대두의 원산지를 한반도로 보는데, 우리 땅에서 가장 많은 대두의 변이종이 발견된 것이다. 이처럼 콩은 한민족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작물이다.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 지대로 가축을 기르기 어려웠던 이 땅에서 콩은 식용 고기를 대체해준 고마운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더불어 콩은 우리의 음식문화도 풍부하게 발달시켰다. 콩으로 메주를 쑤고, 메주로 된장을 만들어 한식의 베이스로 삼았다. 말랑한 순두부와 단단한 부침두부도 만들고, 남은 콩 비지로는 찌개도 끓여냈다. 오늘날 건강식으로 더욱 각광받는 콩의 영양을 선조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몸이 허약하나 바로 고기를 먹을 수 없을 땐 하얀 두부를 먹이곤 했다. 흔히 출소자에게 두부를 주는 것은, 두부처럼 하얗게 죄 짓지 말고 살라는 의미도 있지만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기 위함도 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콩으로 메주를 쑨 대도 안 믿는다.’ 등등 콩과 관련된 우리 속담이, 우리 역사와 문화에서 콩이 얼마나 가까웠는지를 말해준다. 요즘 퀴노아, 병아리 콩 등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곡식들이 우리의 식탁에 오르고 있다. 오래 전부터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대두와 서리태, 적두 등을 먼저 가까이 두고 함께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맨 위, 왼쪽부터) 흔히 모양이 곱지 못한 것을 이르러 메주에 빗대지만, 메주만큼이나 속이 알차고 팔방미인인 식품이 없다. ‘콩 한 쪽도 나눠먹는다’라는 말에서처럼 둘로 나뉘는 콩은 나눔을 상징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한반도에서 자라온 콩은 우리 밥상을 책임져왔다. 두부장수가 종을 흔들며 팔던 따끈한 두부를 기억하는가. 고려의 충신 몽은 이색은 ‘성긴 이로 먹기에는 두부가 그만’ 이라며 두부 예찬을 남기기도 했다.
버릴 것 하나 없는 옥수수
오늘날 세계 3대 작물로 불리며 전 세계인이 즐겨 먹는 식량자원으로 자리매김한 옥수수. 지구에서 옥수수의 뿌리는 약 7,000년 전 남아메리카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쌀이 부족하던 시절, 옥수수를 주로 식량 대용으로 재배해 왔다. 1980년대 이후 찰옥수수 품종이 개발되며, 요즘은 대부분의 농가에서 배를 채우는 식량 용도보다는 간식용 옥수수를 대량 생산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찰옥수수 재배 면적은 대략 1만 5,000㏊로 생산량으로 보면 대략 6억 개, 즉 국민 1인당 1년에 10개 이상을 소비하는 셈이다. 찰옥수수가 개발되기 전에는 맛을 보완하기 위해 옥수수를 사카린과 소금 녹인 물에 넣어 푹 삶아서 먹었다. 찰옥수수뿐만 아니라 초당옥수수도 인기로, 여름이면 시장이나 좌판에서 삶은 옥수수를 파는 풍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 옛날 ‘강냉이’로 불리며 배고픔의 상징이었던 옥수수가 오늘날 알갱이부터 수염을 물론, 자루대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훌륭한 식량 자원이자 친환경 에너지 자원으로 탈바꿈했다. 옥수수 수염은 차로 마시고, 자루대는 가공하여 플라스틱이나 바이오에너지 원료로 쓰인다. 수염부터 자루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옥수수. 옥수수의 변신은 계속된다. 인간과 동물을 위한 식량뿐만 아니라, 지구를 살릴 청정 에너지원으로 개발 중인 옥수수는, 공상과학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미래에 각광받을 곡식이 아닐까.
(왼쪽부터) 밭에서 옥수수를 들고 밝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인 김순권 박사는 슈퍼옥수수 개발로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전 세계의 기아 문제를 옥수수 종자 개발을 통해 해결하려 한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 속에서도 옥수수는 인류의 마지막 식량으로 등장한다. 한편, 영화 <웰컴투동막골>에서는 옥수수 밭에 터진 수류탄이 팝콘을 만들어 내는 동화 같은 장면으로 옥수수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