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찬연한 빛이 어루만지는
평화로운 고독
올해 봄, 그리스의 이드라 섬에서 두 달을 보냈다. 하루 종일 부지런히 걷는다면 섬의 반대쪽 끝에 다다를 수 있을 만큼 작은 섬이었다. 나는 매일 섬의 동쪽으로, 서쪽으로 걸어 다녔다. 맑은 공기가 베일처럼 드리워진 이드라 섬에 밤이 내리면 완벽한 침묵이 찾아왔다. 소음과 공해가 없는 섬에서 보낸 날들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글 사진 김남희(여행작가)
순수한 빛이 가득한 섬, 오늘을 사는 열정의 사람들
나는 매일 섬의 동쪽으로, 서쪽으로 걸어 다녔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금지된 섬이라 당나귀가 택시이자 택배 기사였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보답은 깨끗함과 고요함이었다. 그리스 어디나 그러하듯 이드라에도 빛이 가득했다. 투명하고 순수한 빛의 폭포가 종일 쏟아져 내렸다. 그 빛 아래 레몬이 샛노랗게 익어가고, 부겐빌레아가 핏빛으로 피어나고, 올리브 열매가 알알이 자라났다. 모든 사물을 꿰뚫을 듯 쏟아지는 빛은 거침없고 강렬했다. 이런 빛 잔치가 날마다 벌어지는데 우울할 틈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에는 욕망에 충실한 전통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열정이랄까. 그리스 요리를 배우던 날이었다. 늙은 아버지가 바다에서 소금을 채취하고, 그의 아내가 올리브 오일을 짜고, 뒤뜰의 포도로 와인을 담는 시골 농가였다. 나에게는 엄마의 요리 레시피를 통역하는 딸 이렌느는 올해 서른아홉이었다. 그런데 다음 달에 두 번째 손자가 태어난다고 했다. “내가 열일곱에 애를 낳았거든. 내 아들이 똑같은 짓을 하네. 올해 열일곱이거든. 유전자에 뭐가 있나봐.”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그녀는 깔깔거렸다. 만일 이드라 섬의 그녀가 미래를 계산했다면 아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슬픔도 눈물도 아스라이 사라지는 묘한 세계
빛과 더불어 이드라 섬의 또 다른 주인공은 고양이들이었다. 포구의 카페마다 제일 좋은 자리는 고양이들 지정석이었고, 골목마다 각양각색의 고양이들이 넘쳐났다. 어느 날 포구에서 집으로 향하는 5백 미터 남짓한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를 세어 보니 서른여덟 마리였다. 나는 매일 마주치는 녀석들의 이름을 내 멋대로 지어 불렀다. 줄무늬 꼬리에 이마에는 선글라스 모양의 검은 반점이 있는 ‘너구리꼬리 선글라스’, 주구장창 잠만 자다가 밥 먹을 때만 몸을 일으키는 천하의 게으름뱅이 ‘늘보’, 나만 보면 발라당 드러눕는 회색 고양이 ‘발랑이’, 얼굴 양쪽이 완전히 다른 색인 ‘아수라 백작’ 등등. 그야말로 나는 고양이 섬의 임시 세입자였다. 그 녀석들은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다. 다가가면 힐긋 쳐다보는 걸로 재미없는 인물임을 단박에 알아채고는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인간의 손길에 익숙한지 무턱대고 다가와 꼬리를 비비는 녀석도 많았다. 섬은 ‘고양이 섬’이라 불릴 만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없으니 골목 한 복판에서 낮잠을 자다가 차에 치여 묘생을 마감할 일도 없다. 끼니때마다 사료를 챙겨주고 물을 갈아주는 집사들이 골목마다 상주한다. 길고양이를 상대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나누며 무료한 하루를 보내는 할아버지가 있고, 팔아도 모자랄 사료를 매일 퍼주는 사료 가게 아줌마가 있고, 테이블을 다 차지한 고양이들을 손님인 듯 대접하는 식당 주인들이 있다. 이런 분위기니 당연하게도 고양이들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늘어지게 자는 일이었다. 게다가 섬에는 ‘시에스타’가 있어 2시부터 4시 사이에는 섬 전체가 잠에 빠졌다. 고양이도 사람도 최선을 다해 잤다. 나도 질 수는 없었다. 빠짐없이 낮잠을 챙겼다. 매일 두 시간씩 낮잠을 자는 삶이 가능하다니 굉장한 섬이었다. 낮잠은커녕 밤잠도 모자라고, 게으름은 죄악이 되는 곳에서 살다온 사람이라 더 고양이가 부러웠다. 이 바쁜 세상에 저렇게 사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도 안도가 되는 심정이랄까. 내가 머물던 집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바다가 보였다. 저녁이면 그 계단에 앉아 포구를 붉게 물들이며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했다. 계단에 앉아 있으면 ‘아수라 백작’이 다가와 내 다리에 슬쩍 슬쩍 몸을 비볐다. 녀석의 배를 긁어주며 저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슬픔이나 눈물이 사라진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이드라 섬을 즐기는 낭만적인 방법
오전 9시 새벽 낚시 나갔던 배가 돌아오는 시간, 이드라 섬의 포구가 만들어내는 풍경에 주목해 보자. 어부가 집어 던지는 정어리를 날렵하게 낚아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사를 하는 고양이를 관찰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노천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저녁노을을 보거나, 아침 바닷가에서 돌고래들과 눈을 맞추는 것도 아름다운 이드라 섬의 숨은 매력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