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 정화시설이 설치된 옥상텃밭에 선 한무영 교수 사진

물을 위한 노래

우리는 모두,
걸어 다니는 작은 바다다!

소싯적부터 물을 따라 물을 쫓으며 살아 간 한 사람. 불혹에 비로소 물가로 집을 마련하고, ‘수졸재(守拙齋)’라는 정겨운 이름을 붙이며 물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다.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갖고 있다’ 노래하는 그의 말글을 통해, 물이 우리에게 전하는 생명과 상상의 원천에 대해 음미해본다.
장석주(시인)

물의 아름다움에 취하다
나는 물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는 둠벙이나 내에 나가 물고기를 쫓으며 노는 것을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물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기에 바닷가나 강가에 살기를 바랐다. 마흔 무렵 큰 저수지 가에 집을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본 바로는 물은 봄에 잔잔하고, 여름에는 기후에 따라 거칠게 일렁이고, 가을엔 다시 고요해지고, 겨울엔 얼어붙어 깊은 침묵에 든다. 결국에 나는 그야말로 ‘아무 연고도 없는 물가에 덩그러니 집 한 채 지어놓고 백년 천년 살자고 대책 없이’ 내려왔다. 그리고 이 작은 집에 ‘수졸재(守拙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낮은 자리를 지키며 사는 사람의 집’이란 뜻이다. 그렇게 물가에 사는 동안 자주 물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그래서 공자와 같이 “물이여, 물이여!”라고 감탄하고, 물에서 촉발된 상상력과 은유들로 시를 써서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갖고 있다>라는 시집을 냈다.
물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의 원천에서 솟는다. 이 물은 흘러 내를 이루고, 내가 모여 넓은 강을 이루며, 강물은 바다로 흘러든다. 상상조차 끔찍한 일이지만 물이 없다면 어떤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 지구가 다른 행성과는 달리 생명체들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물 덕분이다. 아울러 우리 몸은 태반이 물이다. 피, 땀, 오줌 따위의 성분이 물이다. 인체의 70%가 물이라니, 지구에 사는 70억 하나하나는 제 안에 작은 바다를 갖고 사는 셈이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작은 바다다!
인류 초기의 거주지가 강을 따라 형성된 것은 물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불가결한 요소임을 드러낸다. 사람은 물을 마시고, 밥을 짓고, 몸을 씻으며, 물과 더불어 살아간다. 새와 들짐승과 사람은 이 물에 기대어 생명을 잇는다. 새와 들짐승과 사람은 물에 잇대어 있고, 생명을 받아 사는 것들은 모두 물의 문중이다. 물은 흘러서 대지를 적시고 씨앗의 발아를 돕고 줄기를 뻗는 식물의 성장을 돕는 것이다. 물은 심미적 관조의 대상이고, 생명의 기초 조건일 뿐만 아니라 생활과 경제를 일구는 중요한 자원이다. 예로부터 좋은 정치와 나쁜 정치는 이 물을 어떻게 관리하고 다스릴 것인가에 의해 결정되었다. 물이 사람의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그만큼 막대했던 탓이다.

물에서 찾은 영감과 지혜, 그리고 생명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고, 그 흐름이 그치는 법이 없다. 물은 부드럽고 약하지만 바위를 뚫고 산을 무너뜨린다. 동양의 철학자들은 이런 물을 탐구하고 물의 성질에서 인간 보편의 원리를 찾아냈다. 그들은 물에서 영감과 지혜를 얻어 “물은 땅의 피요 기(氣)다”라고 했다. 공자는 물의 흐름을 굽어보며 “지나가는 것이 다 이와 같구나. 밤낮으로 그 흐름이 끊기지 않는구나.” 했다. 노자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이 선함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만인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거처하는 것이다. 물은 도와 가깝다.”라고 했다.
지구가 생명체들을 부양하는 초록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생명 기반이 되는 물이 풍부한 덕분이다. 물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 무위(無爲)함으로 만물을 이롭게 한다. 그래서 동양의 현자들은 물과 도를 하나로 겹쳐 본다. 내 영혼이 저 불멸의 바다를 항상 그리워하는 것은 내가 물로 된 존재이고, 물이 내 본성에 각인된 태고의 고향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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