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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머무는 자리

물이 품은 그 수많은 것들

“저기 지구가 보인다.” 1968년 크리스마스 이브, 아폴로 8호는 인류 최초로 달의 지평선 너머로 지구가 돋는 장면을 촬영했다. 그 푸른 광채는 모두의 가슴을 뛰게 했다. 바다, 강, 호수, 작은 샘들이 만들어낸 푸른 합창은 분명히 말했다. “지구는 물의 행성이다.” 인간은 물로 말미암아 태어났다. 물과 어울리며 문명을 만들었다. 물에 띄운 배로 세계를 탐험했고, 저 너머로 날아가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지구인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물의 아이들이다.
이명석(문화비평가) 그림 배중열

물과 함께 울고 웃는 인류의 생활사
누군가 숲 속의 작은 샘에 카메라를 장치해 두었다. 그러자 여러 손님들이 차례로 화면에 등장했다. 참새, 토끼, 다람쥐, 잠자리 등 온갖 생명체들이 찾아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물이 없다면 생명은 없다. 나무가 뿌리를 뻗고, 낙타가 사막을 헤매고, 농부가 마른 하늘을 쳐다보는 이유는 모두 똑같다. “여기, 물 좀 주소!”
물이 생명을 만들었다면, 강은 문명을 만들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 인더스 강과 황허 강의 유역에서 고대 문명이 태어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자원인 물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물가의 생기 넘치는 나무 아래 터전을 잡은 인류들은 물고기를 잡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고, 배를 띄웠다. 고대의 세계만이 아니다. 가장 최근에 세워진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보라. 뉴욕, 플로리다, 샌프란시스코는 바다를 곁에 두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뉴올리언스, 세인트루이스, 시카고는 미시시피 강과 오대호가 만들어냈다. 당연히 한강이 없다면 서울은 없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의 다툼에서 밀려난 포세이돈은 하늘과 땅이 아니라 바다를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괜한 심술을 부려 풍랑을 일으키곤 했다. 이는 물의 변덕을 상징한다. 물은 손안에 담으면 새버리고 겨우 모았다 싶으면 말라버린다. 비는 원하는 때에 내리지 않고, 또 온다 싶으면 삽시간에 불어나 마을을 집어삼킨다. 그러니 물을 다루는 치수(治水)는 세상을 다스리는 기본이 되었다. 인류는 온갖 지혜와 힘을 모아 수로를 정비하고 둑을 쌓았다. 바닷가에서는 너울과 쓰나미를 물이 품은 그 수많은 것들 “저기 지구가 보인다.” 1968년 크리스마스 이브, 아폴로 8호는 인류 최초로 달의 지평선 너머로 지구가 돋는 장면을 촬영했다. 그 푸른 광채는 모두의 가슴을 뛰게 했다. 바다, 강, 호수, 작은 샘들이 만들어낸 푸른 합창은 분명히 말했다. “지구는 물의 행성이다.” 인간은 물로 말미암아 태어났다. 물과 어울리며 문명을 만들었다. 물에 띄운 배로 세계를 탐험했고, 저 너머로 날아가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지구인들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물의 아이들이다. 글 이명석(문화비평가) 그림 배중열 05 물이 머무는 자리 막아야 했고 높은 산지에서는 물을 끌어올려야 했다. 과학의 발전은 결국 물을 다루는 힘을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거대한 다목적 댐을 세워 전기를 생산하고 관개 용수를 공급하고 홍수를 통제할 수 있게 되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물의 혜택을 받는 땅은 좁다. 거기에 사람이 넘쳐나면 어떻게 하나? 다른 땅으로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때에도 물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망, 하늘을 넘나드는 항공기가 만들어지기 전에 여행과 운송의 핵심적인 수단은 선박이었다.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낯선 바다로 가거나, 허클베리 핀처럼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가야 했다. 이렇게 떠난 이들은 또다시 물의 혜택을 잘 받는 곳, 수향(水鄕)에 자리를 잡았다. 혹은 물이 막혀 있다면 물길을 내기도 했다. 파나마와 수에즈 운하는 바다와 바다를 이어 새로운 항로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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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휴식과 유희, 현대에도 변치 않는 기쁨의 원천
물은 휴식과 유희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삶에 지치면 강이나 바닷가를 찾아간다.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잊어버렸던 자신을 찾는다. 물가의 쾌적한 공원을 거닐고, 친구들과 소풍을 즐기고, 석양이 지는 물결을 보며 음악을 듣는 일은 우리를 회복시킨다. 동서양 모든 도시의 사람들은 제각각 물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왔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인들처럼 물과 제대로 엮인 경우를 찾을 수 있을까? 6세기경 몽골계인 훈족이 이탈리아 내륙을 침입해오자 사람들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습지로 도망갔다. 그들은 물을 낯설어하는 적을 피해 바다 위에 도시를 세웠다. 좁은 운하로 도로를 대신했고 마차 대신 곤돌라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적은 피했지만 어떻게 먹고 사나? 그 역시 물이 답이었다. 베네치아의 영토는 좁았지만 바다는 무한했다. 그들은 지중해를 오가는 해상 무역을 개척해 부를 축적했고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치는 막강한 금융 자본을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네치아의 상인>은 당시 베네치아인들이 유럽 부자의 대명사로 통했음을 잘 보여준다. 지금의 베네치아는 당시만큼 위세를 떨치진 못하지만, 천 년 이상 물 위에 만들어온 문명을 관광상품으로 삼아 세계의 여행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서울 시민들 역시 물을 통해 삶을 바꾸어왔다. 20세기 전반만 해도 종로통과 그 인근은 물길이 정비되지 않아 악취 가득한 진흙투성이 길이었다. 청계천 인근은 빈민들의 판자촌이었고 토사 매몰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었다. 첫 번째 변화는 물을 지우는 것이었다. 1958~1978년에 걸쳐 청계천은 콘크리트로 덮였다. 그런데 올바른 답이 아니었던 것 같다. 두 번째 변화는 그 물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청계천은 2005년 쾌적한 물길로 복원되었고 시민들의 휴식과 여가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주변의 대기질, 소음, 열섬 현상을 개선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수백 종의 생물이 복원되었다. 독일의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는 자신이 본 가장 훌륭한 놀이터로 청계천을 뽑기도 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나? 물에서 와서 물로 돌아간다.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끼나? 고단한 일과를 보낸 뒤 냉수 한 잔을 들이켤 때, 어린 아이가 분수대에서 깔깔대며 뛰어놀 때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어떻게 찾고 있나? 저 너머로 우주선을 날려, 한 줌이라도 물이 있는 미지의 별을 찾으려 한다. 물론 그 이전에 물의 행성, 지구와 다정히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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