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는 영화관
매직 아워,
모든 것이 허락되는 시간을 담다
아카데미를 빛낸 영화들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여러모로 이례적이었다. 작품상 수상 결 과가 잘못 발표되는 사고는 두고두고 기억되겠지만 한편으론 올해 작품상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증명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사 실 대세는 평단의 사랑과 흥행을 한 손에 거머쥔 <라라랜드>였지만 <문라이트>가 인종과 다양성이라는 시대정신을 대변하며 올해의 주 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두 작품 모두 올해의 주인공이었다.
글 송경원(씨네 21 기자, 영화평론가)
스크린에 담아낸 석양의 순간, 라라랜드
<라라랜드>와 <문라이트>가 완전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하면서도 어 떤 측면에서는 매우 닮은 영화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선 감독인 다 미엔 차젤레와 배리 젠킨스 두 사람 모두 매우 젊은 신인이다. 단 2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했지만 겨우 2번째 영화로 다미엔 차젤레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배리 젠킨스는 작품상을 차지했다. 이들은 단지 나이가 젊은 것 이외에도 영화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새롭고 감각적 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기존의 관습을 무작정 따르지 않고 제한된 환경에서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짜낸 것이다. 외견상 두 영화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건 카메라의 움직 임과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색감의 구현이다. 두 영화 속 카메라의 움 직임은 현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시종일관 움직인다. 영화 속 색 감과 결합했을 때 이 움직임은 단지 멋스러움을 넘어 감독의 시선이 된다. 두 감독이 각자 읽어낸 세계의 형태라고 해도 좋겠다.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라라랜드>는 1950년대 LA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다.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배우 지망 생 미아(엠마 스톤)와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서로를 알 아보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쉽지 않은 시간을 지나며 갈등은 쌓여 가고 모호했던 꿈이 점차 형태를 갖춰갈수록 연인은 멀어지기 마련 이다. 진부하다고 해도 좋을 꿈과 사랑의 엇갈림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라라랜드>에 열광한 것은 다름 아닌 꿈을 그려내는 방식 때문이다. 다미엔 차젤레 감독은 전작 <위플래쉬>를 찍기 전부터 <라 라랜드>의 대본을 썼다. 아마도 그가 생각하는 영화적인 표현은 다 름아닌 뮤지컬이었을 것이다. LA로 들어서는 고가도로 위에서 시작 되는 오프닝 공연은 지금부터 꿈과 환상의 나라로 들어가겠다는 선 언과 함께 화려한 춤과 노래를 선보인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고가도 로 위 시퀀스는 화사한 햇살, 선명한 원색의 자동차들과 함께 <라라 랜드>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배우들의 역동적인 동작과 밝은 표정 이 더해지는 순간 꽉 막힌 LA 고가도로는 그대로 무대가 된다. 어쩌 면 뮤지컬영화이기에 허락된 마법일 것이다. 이 때 다미엔 차젤레의 카메라는 무대를 휘젓는 주인공처럼 다리 위 곳곳을 누비며 관객을 영화 속으로 초대한다. “오프닝만으로도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을 만 하다”는 버라이어티의 분석은 빈말이 아니다.
라이너스 산드그렌 촬영감독의 마법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대 위를 뛰어다는 듯한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 또 다른 하나는 총천연 색의 색감이다. <라라랜드>는 화사한 햇살의 질감을 살려내기 위해 자연광의 느낌이 나도록 조명을 활용한다. 사실 진짜 자연광으로는 이런 밝은 콘트라스트를 내는 게 어렵다. 이건 자연광을 닮은 질감을 낼 수 있도록 철저히 통제된 조명이다. 이는 자연광을 완벽히 파악하 고, 잡아낼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라라랜드>에서 가장 아름다 운 장면 중 하나는 해 질 무렵 LA 언덕 위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호흡도 사랑스럽지만 그 장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석양이다. 모든 것이 무장해제 되는 ‘매직 아워’, 해질 무렵 찰나의 시간에만 허락된 오묘한 빛깔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낸 것이다. 10분도 채 되지 않는 그 순간의 석양을 담아내기 위 해 수 십 번 연습을 한 뒤 단 한 번 촬영으로 완성했다. 카메라의 움 직임부터 색감까지 ‘만들어낸 환상’이지만 그것을 스크린에 옮겨 담 는 과정은 실로 영화적인 마법의 순간이라 할만하다.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는 소년들, 섬세하게 그려낸 밤의 색감
재미있는 건 비슷한 ‘매직 아워’가 <문 라이트>에도 담겨 있단 사실이다. <문 라이트>는 흑인 성소수자 소년의 성장 담을 소년, 청소년, 성인 세 파트로 나 눠서 담은 영화다. 마찬가지로 익숙한 스토리를 다루고 있지만 표현방식만큼은 구성부터 촬영방식까지 전 형적인 요소가 하나 없다. 더 인상적인 것은 마이애미라는 도시를 담 아내는 방식이 <라라랜드>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촬영감독 제 임스 랙스턴은 마이애미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화면에 옮기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덕분에 밝은 햇살 아래 화사한 원색의 색감과 인물 의 어두운 감정이 대비를 이루며 극적인 효과를 자아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요소는 섬세하게 잡아낸 밤의 온도, 밤의 색깔에 있다. 전반적으로 어둠이라기보다는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색이라는 느낌인데, 영화의 주제와도 정확히 부합한다. <문라이트>는 ‘달빛 아 래에선 흑인 소년들도 푸르게 빛난다’는 한 문장을 향해 달려가는 영 화다. 흑인과 백인, 성소수자의 구분 없이 모두가 평등해지는 마법의 순간이라 해도 좋겠다. 모두를 푸른색으로 빛나게 만드는 달빛 아래 평등을 꿈꾸는 소년에게 영화는, 그리고 배리 젠킨스 감독은 종종 달 빛을 담은 화면을 통해 그런 마법 같은 시간을 허락한다.
결정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주인공이 마약중독치료소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 ‘쿠쿠후쿠쿠 팔로마’의 음악이 흘러나오면 영화는 달빛 아래 뛰어노는 소년들의 모습을 오버랩한다. <문라이트>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영화는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달을 보여준다. 이 건 서사적인 맥락에서 설명하는 장면이 아니다. 인물의 심상이 고스 란히 투영된 화면, 한 장으로 기억되는 결정적 이미지인 셈이다. 이 렇듯 우리를 영화라는 환상 속으로 초대하는 석양과 달빛. 카메라가 담아낼 수 없는 그 찰나를 담아낸 것만으로도 두 영화가 아카데미의 영광을 차지할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